(작곡가, 전자음악가)
목소리와 랩탑, 인간과 기계의 합주
“2022년에 오랜만에 솔로 공연을 하게 되었고 부담없이 음악을 만들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자연스럽게 나온 게 보이스 퍼포먼스였다. 오랜만에 다른 보컬 없이 나의 목소리로 직접 실험을 하면서 공연을 준비했다. 그 때 만들어진 나의 목소리가 담긴 음원이다.”
삶에서 가장 기억에 남는 소리를 마주한 경험을 들려줄 수 있나?
모태 신앙을 가지고 있어서 나에게 가장 익숙한 소리는 교회에서 접한 음악이다. 일주일에 한 번씩 교회에 가서 그런 음악을 어마어마하게 경험하고, 성가대와 피아노 반주를 하면서 체화한 소리들이 있다. 가장 인상 깊은 소리 경험이라면 2019년에 사운드스케이프 작업과 리서치를 하러 베를린과 파리에 간 일이 떠오른다. 파리에 메시앙(Olivier Messiaen)이 연주한 교회가 있는데, 거기에 가서 때마침 오르간을 연주하는 소리를 들었다. 연주하는 곡을 떠나서 그 공간에서 울리는 소리 경험이 굉장히 강렬했다. 또 하나는 파주에 있는 음악 감상실에서 한 경험이다. 처음에는 큰 기대를 안 하고 갔는데, 엄청나게 큰 옛날 스피커들에서 나오는 음향 경험이 인상 깊었다. 마지막으로 하나 더 이야기하자면,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처음 착용한 때다. 보통 클래식 음반은 아무리 볼륨을 크게 해도 지하철같이 소음이 큰 공간에서는 잘 들리지 않는다. 어느 날 지하철 플랫폼으로 가면서 노이즈 캔슬링 이어폰을 꼈는데, 그 순간 모든 소리들이 청소기에 빨려 들어가듯 사라지는 경험이 굉장히 인상 깊었다.
피아노는 언제부터 배웠나?
8살부터 배웠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소리를 좋아했고, 매일 혼자 피아노를 쳤다. 사실 어릴 때 연주한 건 진짜 피아노가 아니라 전자 피아노인 다이나톤이었다. 그 안에 다양한 소리들이 있어서 그걸로 연습하면서 음악에 어울리는 음색을 찾아서 친다거나 했는데, 그런 것도 중요한 경험이었다.
그런 소리를 들으면서 나는 이런 소리는 좋아하고 이런 소리는 별로 안 좋아한다는 취향이 생겼나?
사실 별다른 취향은 없는 것 같다. 취향은 주관적이고 계속 바뀐다. 오히려 소리에 많이 열려 있는 것 같다. 때로는 취향이 없는 게 좋다는 생각을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마스터링이 잘된 음원이 좋을 때도 있고 핸드폰으로 녹음한, 음향적 측면에서 별로 안 좋은 소리가 더 좋을 때도 있다.
작곡과를 졸업하고 음악테크놀로지과에 들어갔다. 작곡과를 졸업할 때는 아방가르드한 음악에 관심이 있었다고 들었는데, 어떤 목마름 때문이었나?
어릴 때부터 혼자 피아노 치고 노래하는 걸 좋아하다 보니 중학교 때 음악 선생님이 전공을 해보지 않겠냐고 권유하셨고, 그렇게 예고에 진학하게 됐다. 예고에 가서는 클래식을 공부했다. 그렇게 자연스럽게 클래식 작곡과에 진학했는데, 내가 정말 클래식 애호가들처럼 고전 음악을 좋아한 사람은 아니었다. 모든 음악을 다양하게 듣는 편이었다. 대학교에 진학할 때도 영화 음악이나 뮤지컬 음악을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막상 학교에서는 현대 음악을 배우게 됐다. 현대 음악 공부가 어렵긴 했지만 나름대로 즐거웠다. 다만 졸업한 뒤에 유학을 간다거나 더 진지하게 현대 음악을 계속할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이제 나는 어떤 음악을 하면서 살아야 하나 생각하던 시점이 대학교 4학년 때다. 그때 프랑스 리옹과 음악음향조율연구소 이르캄(IRCAM)에서 활동한 선생님 수업을 듣게 됐고, 그게 중요한 경험이 됐다. 내가 다닌 학교에는 미국에서 공부한 선생님들이 많았는데, 그분은 유럽에서 전자 음악까지 공부하신 분이라 스타일도 너무 달랐다. 선생님께 레슨을 받으면서 이르캄에서 만들어진 음악이나 여러 다른 음악을 들으면서 전자 음악에 호기심이 생겼다. 처음에는 유학을 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까지 내가 아는 것만 현대 음악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면서 유학을 가기 위해 영어 공부를 시작했는데, 결국 공부보다는 인터넷에서 음악을 더 많이 찾고 있었다. 누군가 블로그에 아카이빙해 둔 전자 음악을 찾아서 듣기도 하고, 다양한 전자 음악을 많이 들었다. 세상에 이렇게 좋은 음악이 많구나 싶었다. 음악과 인터랙션이 되는 오디오 비주얼 작업을 보면서 이런 세계가 있구나 놀라기도 했다. 그때 엘지아트센터나 미술관, 홍대 대안 공간들에서 사운드 아트 작업을 많이 소개했다. 그런 공연을 찾아다니면서 다른 세계를 경험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유학보다는 한예종 뮤직테크놀로지과를 선택하게 됐다.
대학교에 다니면서 자연스럽게 전자 음악이나 현대 음악에 많이 노출된 것으로 들린다. 한국 대학에 있는 작곡과는 분위기가 대부분 그런가?
솔직히 그때 학교 커리큘럼이 ‘올드하다’고 생각했고, 지금도 별반 다르지 않다고 느낀다. 다른 사람들도 나하고 비슷한 경험을 한지는 잘 모르겠다. 학교마다 다를 것이다.
인터뷰를 위해 조은희가 한 작업을 정리하다 보니 ‘사운드 맵’과 ‘포스트 음악극’ 이라는 두 가지 방향성이 보인다. 먼저 사운드 맵을 이야기해 보자. 2015년부터 지금까지 사운드 맵이라는 이름으로 장기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다.
처음부터 이게 장기 프로젝트가 될지는 몰랐다. 2008년부터 2010년까지 뮤직테크놀로지과를 다닐 때 학교 교수님이 현재 태싯그룹의 멤버인 장재호 선생님이었다. 태싯그룹의 이진원 님은 같은 학과 선배였다. 그 시기에 태싯그룹이 만들어졌고, 코딩이나 피지컬 컴퓨팅을 배우면서 많은 영향을 받았다. 태싯그룹 공연에 연주자로 참여하면서 투어를 함께하기도 했는데, 그때 공연 기획이나 여러 가지 프로세스를 익힐 수 있었다. 그러면서 이제 나만의 것을 해보자는 마음이 생겼고, 기술과 예술 사이에 있는 뭔가를 음악으로 해보자는 생각을 했다. 그렇게 만든 첫 공연이 2014년에 발표한 〈송 에 뤼미에르(Son et lumière)〉다. 그 뒤로 또 어떤 걸 할 수 있을지 고민하던 차에 수원문화재단 지원 사업 공고를 보고 뭔가 해보자고 마음을 먹었다. 처음에는 수원이라는 곳에 관해 잘 몰랐는데, 리서치 과정에서 수원 화성을 발견했고, 그곳 풍경이 나에게 굉장히 새로웠다. 그 공간이라면 새로운 사운드 작업을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 뒤로 새로운 공간에 관한 리서치와 상상을 이어가면서 사운드 맵이 이어지게 됐다.
어쩌면 우연한 시작일 수도 있지만 수원 화성 작업을 한 뒤로 사운드 맵, 또는 사운드스케이프 관련 작업을 꾸준히 하고 있다. 그 작업이 중요해진 이유는 무엇인가?
원래 앉아서 혼자 오래 작업하는 걸 잘하지 못한다. 2008년부터 2013년까지 계속 컴퓨터하고 싸움을 하면서 기술을 익히는 시간을 보냈는데, 꽤 힘든 나날이었다. 컴퓨터로 하는 작업 말고 내가 더 잘할 수 있는 게 뭘까 고민했는데, 사운드 맵 작업을 하면서 밖으로 나가 보니 정말 좋았다. 연주자들하고 협업하는 즐거움도 배울 수 있었다. 야외에서 녹음한 걸 집으로 가져오면 물론 다시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기는 하지만 밖에서 한 경험이 작업을 지속할 재미와 힘을 줬다. 함께하는 연주자들이랑 협업하는 즐거움도 알았고.
어떤 공간을 조사하면서 책과 인터넷을 활용하는 게 정보가 더 많을 때도 있다. 반면 조은희는 꾸준히 현장을 찾아서 녹음하고 작업해 왔다. 컴퓨터로 자료를 찾을 때와 현장에서 리서치를 할 때 차이는 무엇인가?
공간을 발견할 때는 당연히 인터넷을 사용해서 사전 조사를 한다. 하지만 현장에 가 보면 더 잘 이해되는 것들이 있다. 2017년과 2018년에 작업한 공간이 한강이랑 태백산맥이었는데, 실제 공간에 가 보면 왜 서도 민요는 더 굵게 떠는지, 서울에서는 왜 더 그렇게 얌전하고 우아하게 부르는지, 강원도에서는 왜 좀더 서정적인 울림이 나오는지 느낄 수 있었다. 똑같은 산이라도 부드러운 느낌을 주는 곳이 있고 더 웅장한 느낌을 주는 곳이 있다. 그런 미묘한 차이와 그 공간에 담긴 어떤 영적인 에너지가 도움이 된다.
사운드스케이프 작업을 할 때 구체적인 과정도 궁금하다. 들리는 모든 소리를 다 녹음할 수는 없으니 결국 어떤 소리를 녹음할지는 선택이 중요할 텐데, 소리를 채집할 때 자기만의 방식이나 접근법이 있는가?
대부분 내가 주관적으로 좋아하는 소리를 녹음하게 된다. 흐르는 물소리나 새소리, 지나가는 거리의 소리들이다. 그런 소리가 공간의 온도나 습도에 따라 조금씩 다르게 들린다. 공간의 소음도 나라마다 조금씩 다르다. 녹음 방식에 관련해서는 작업을 오래 하면서 관점이 좀 변화했다. 처음에는 새소리를 녹음하려고 하면 차가 지나가는 소리나 주변 소음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는데, 지금은 그 공간의 소리를 내가 임의로 삭제하지 않으려 한다.
2019년에는 사운드 맵 작업의 하나로 파리와 베를린에 리서치를 다녀왔다. 어떤 소리를 듣고 무슨 성과를 얻었나?
해외에서 리서치를 하려고 할 때 어느 정도 예상한 게 있었다. 예를 들어 이런 소리는 좀 다를 거 같고 이런 건 비슷하지 않을까 하는. 내 예상이랑 비슷한 부분도 있었지만, 녹음 과정에서 내가 예측하지 못한 일들이 많이 벌어졌다. 어떤 소리를 기대하고 가보니 아무 소리도 없는 경우도 있었고, 그래서 훨씬 더 예민하게 귀를 열고 다닌 거 같다. 예측하지 못해서 좋은 소리도 많다. 그곳의 언어가 익숙하지 않을 때는 사람들 말소리나 텔레비전 소리가 모두 노이즈처럼 들리기도 했다. 필드 레코딩 말고도 파리에서 현지 사운드 아티스트랑 같이 협업한 시간도 좋았다. 베를린에서는 내 작품을 현지 연주자들이랑 즉흥으로 연주한 적이 있는데, 원래 국악기로 연주한 곡의 콘셉트만 가져와서 다른 악기로 연주할 때 받은 느낌이 인상적이었다. 이때 즈음 만든 작품에서는 주로 전통 악기를 사용했는데, 해외 리서치를 하면서 그런 부담감도 줄어든 것 같다.
필드 레코딩에서 작업을 시작할 때 녹음된 파일을 다시 들어보는 일부터 되게 큰 노동이지 않을까 생각한 적이 있다. 이제는 작업 방식에 많은 노하우가 쌓여 있을 텐데, 녹음된 소리를 작업물로 발전시키는 과정이 궁금하다.
수원 화성에서 작업할 때는 연주자들이랑 함께 다양한 장소를 찾고 그곳에서 소리가 어떻게 들리는지 실험했다. 수문이 모두 일곱 개 있는데, 그중 하나가 리버브(reverb)가 정말 좋았다. 그러면 그곳에서 물이 흐르거나 떨어지는 소리를 녹음하기도 했고, 같이 간 연주자가 이 공간에서는 어떤 음악을 연주하면 정말 좋을 것 같다는 아이디어를 주기도 했다. 연주자들이랑 대화하면서 전통 악기와 음악에 관한 공부도 할 수 있었다. 연주자나 동행한 촬영 감독이 같은 공간에서 서로 다른 소리를 들을 때도 재미있었다. 그런 과정을 작품으로 발전시키면서, 수원 화성 사운드 맵도 그렇고, 초기에는 나만의 주관으로 소리를 선정하고 최대한 깔끔한 공연으로 완성하는 데 집중했다. 녹음된 소리도 최대한 깨끗한 음질로 사용하려 했다. 최근에는 그런 방식이 내가 들은 소리들을 너무 많이 삭제하는 것 같아서 좀더 풍부하게 소리를 들려줄 방법을 고민하고 있다. 꼭 무대라는 공간에서 하는 공연 형식이 될 필요도 없고, 그래서 공공 예술이나 거리 예술에도 관심이 생기고 있다.
어떤 장소의 소리를 녹음해서 그 결과물을 공연이나 전시로 표현할 때 결국에 전달하고 싶은 이야기는 무엇일까?
내가 경험한 공간을 관객들도 자기만의 공간으로 느끼면 좋겠다. 똑같은 공간에서도 저마다 다른 기억과 해석을 가지게 되고, 어떤 지점에서는 공감이 발생한다. 뭔가를 구체적으로 제시하기보다는 열어 두고 싶다. 그런 일을 하는 데 음악이 꽤 적절하다는 생각을 한다.
전통 음악인, 특히 즉흥에 강한 연주자들하고 협업을 많이 했다. 특별한 이유가 있나?
같이 작업하면 재미있다. 사실 처음에는 전통 음악을 하는 분이 인터랙티브 비주얼 작업을 도와 달라는 제안을 해서 시작하게 됐다. 클래식을 전공하고 전통에 관해 너무 아는 게 없던 시기라 우선 가야금을 배우기 시작했다. 나는 내가 악기로 직접 해봐야 하는 사람이라 시간이 좀 걸린다. 가야금을 배우면서 전통 음악이 지닌 매력을 점점 알게 됐고, 국립극장에서 하는 여우락 페스티벌 공연을 보면서 더 많은 매력과 호기심을 느꼈다. 간혹 전통 악기를 조율하는 문제 때문에 함께 작업하기 어렵지 않냐는 질문을 받기도 하는데, 현대 음악과 전자 음악의 미분음과 현대 주법, 노이즈 등에 이미 익숙해서 협업 자체는 전혀 불편하지 않았다. 협업은 일단 재미있으니까 계속한 거 같다. 즉흥을 하면서도 내가 모르던 점을 배운 게 많다.
작업에서 즉흥적 요소가 중요한가?
사실 내가 배운 클래식의 전통은 작곡가가 완전히 통제하는 악보 기반 음악이 많은데, 그게 나한테 잘 맞지 않았다. 악보에 가두기보다는 열어 놓고 작업할 때, 그때마다 미묘하게 달라지는 게 더 재미있었다. 개인 작품을 준비할 때도 연주자들이랑 합주보다는 대화를 많이 했다. 그런 대화가 잘될 때 즉흥을 해도 공감대가 잘 형성되는 거 같다.
이제 다른 한 축인 포스트 음악극 이야기를 해보자. 사실 음악으로 어떤 이야기를 전달하는 예술은 오랜 역사가 있다. 성가나 오페라는 물론이고 교향곡도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 사례가 많다. 조은희가 생각하는 ‘포스트’ 음악극은 지금까지 나온 표제 음악들에 견줘 지향점이 어떻게 다른가?
포스트 음악극은 2016년에 한 오페라 작업이 단초가 됐다. 뮤지컬이나 대중적인 음악도 좋아해서 오페라에서도 한국어로 노래를 만들고 싶었다. 그래서 우리말의 말맛이 잘 살아있다고 생각하는 백석의 시를 활용해 〈JAYA〉라는 음반을 만들었다. 그 뒤로 내가 하는 전자 음악을 결합해 지금 시점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총체극 같은 걸 해보고 싶은 욕심이 생겼다. 처음에는 〈JAYA〉를 발전시킨 공연을 만들어 보려 했는데, 더 욕심이 생겨서 텍스트와 사운드에 관련된 실험을 더해 〈포스트 음악극 시〉를 만들었다. 〈포스트 음악극 시〉에서 나에게 중요한 지점은 사운드로 내러티브를 만든다는 것이었다.
소리를 통한 내러티브의 전달은 나도 흥미로웠다. 〈포스트 음악극 시〉는 언어 이전의 소리가 교회의 성가, 다성 음악을 지나 현대 오페라로 발전하는 여정을 다룬다. 이아람하고 함께 작업한 〈네우마와 정간보〉(2021)도 비슷한 내러티브가 읽힌다. 조은희라는 음악가에게는 소리가 어떻게 발생하고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묻는 질문이 중요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맞다. 계속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미 완성된 장르로서 오페라나 뮤지컬을 완성도 있게 만드는 사람은 많다. 그런 사람들하고 다르게 예술가로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계속 질문을 던지는 거라고 생각한다. <네우마와 정간보>작업을 할 때는 1800년에 우리나라에서 이런 노래가 불릴 때 그 시대 유럽에서는 또 어떤 노래가 불린 건지 비교한 뒤 그 결과를 바탕으로 작품을 만들었는데 꽤 재미있었다.
다시 질문 방향을 바꿔 보자. 전자 음악가로서 많은 툴과 기술을 연마해 왔다. 음악가로서 테크놀로지를 바라보는 관점이 궁금하다.
옛날에는 테크놀로지가 뭔가 나를 더 확장시켜 주고 새로운 걸 만들어 줄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은 큰 환상은 없다. 예를 들어 내가 사용하는 컴퓨터 기술이 공연을 만들 때 조명을 다루는 기술에 비교할 때 더 대단한 기술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어쨌든 나는 좋은 음악을 만들고 싶은 거고, 거기에 필요한 기술이 있고, 또 그 기술도 종류가 너무 많은데, 그중에 내가 필요한 걸 쓰는 거다. 테크놀로지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거기서 새로움을 찾는 사람들도 있는데, 개인적으로는 기술을 사용하더라도 작품에서 너무 전면에 드러나지 않는 걸 좋아한다. 첨단 기술을 활용하더라도 작품 자체에서는 기술이 앞에 보이지 않는 그런 작업들이 좋다.
테크놀로지는 예술가에게 많은 선택지를 주지만 자유도가 늘어날수록 창작은 더 어려워진다고 생각한다. 식당에서 고를 수 있는 메뉴가 너무 많으면 뭘 먹을지 고민이 되지 않는가. 조은희에게는 서양의 화성법부터 필드 레코딩, 컴퓨터로 만든 노이즈까지 정말 많은 메뉴가 있어 보이는데, 음악을 만들 때 그래서 생기는 어려움은 없나?
20대 때는 내 팔레트에 몇 개밖에 물감이 없었다. 나에게 물감이 많으면 그걸로 원하는 거를 더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고 믿었고, 그걸 수집하는 작업을 20대, 30대에 꾸준히 해온 것 같다. 지금은 내가 뭔가를 하고 싶다는 것이 분명하게 있으면 그 안에서 자유롭게 꺼내 쓸 수 있다. 모든 기술을 다 사용하는 건 아니고, 실제 작업에서는 어떤 제한을 둘 때 그 안에서 더 실험적이고 자유로운 결과가 나온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작업의 콘셉트와 아이디어, 리서치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작곡가들이 무대에 직접 오르는 경우가 많지는 않은데 조은희는 늘 무대에서 연주를 한다. 무대에 애정이 있는 건가?
어쨌든 내 기획이면 내가 해야 한다고 생각했는데, 최근에는 어떤 환경을 만들어 주는 것도 내 작업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꼭 내가 연주해야 한다는 마음을 덜 먹게 되는 것 같다.
공연장에서 컴퓨터 앞에 있을 때는 주로 어떤 일을 하나?
소리를 들으면서 실시간으로 변화를 준다. 미리 만든 여러 사운드 재료를 그 시간의 흐름과 분위기 안에서 믹싱하고 요리한다. 공연할 때는 그래서 그런지 완성도를 위해 프리 프로덕션을 많이 하기보다는 현장에서 일어나는 즉흥적이고 실험적인 변화를 더 좋아한다.
조은희의 작업물은 현재 ‘컨템퍼러리 아트’라는 카테고리로 소개되고 있다. 동시대성이라는 말을 어떻게 소화하고 있나?
컨템퍼러리한 작품을 만들려고 지향하는 사람인 것 같기는 하다. 다만 예전에는 소리나 음악 측면에서 컨템퍼러리를 고민했다면, 최근에는 시대나 사회적 이슈들에 관련해 고민하게 된다. 어쨌든 현재 이 시점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걸 해야 한다고 생각하다 보니까 나에게는 동시대성이 중요한 이슈다.
동시대, 현시점에서 조은희가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소리가 있는가?
어떤 소리보다는 서로 내는 소리들을 듣고 소통하는 일이 중요한 것 같다. 예를 들어 내가 함께 작업한 김보라나 이아람은 전통 음악인이지만 컨템퍼러리를 지향하는 사람이고, 우리는 함께 만나서 음악을 하고 있다. 각자 전문 분야는 다를지 몰라도 우리가 한국에서 태어나고 자라면서 듣고 체화한 공통된 지점들이 있고 다른 지점들도 있다. 그런 배경을 이해하고 소통하는 것이 중요한 것 같다.
조은희의 무의식을 수음할 수 있는 가상의 마이크가 있다면 어떤 소리가 녹음될 것 같나?
어떤 말인지는 모르겠지만, 내 목소리가 녹음될 것 같다. 컴퓨터로 소리를 합성하는 기술을 배울 때, 사람 목소리만은 완벽하게 흉내 내기 어렵다고 배웠다. 그래서 그런지 내 작업에서는 사람 목소리가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테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