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예술가)
“음악을 잘한다는 것, 유명한 홀에서 공연하는 것,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것, 그리고 자본주의 사회에서의 권력이란 무엇일까??”
* 음원은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Florence Foster Jenkins)가 부른 모짜르트의 오페라 <밤의 여왕>이다. 플로렌스 포스터 젠킨스는 음악을 사랑한 미국의 부호로 ‘음치’ 소프라노로 유명하다. 부모에게서 상속받은 막대한 유산을 바탕으로 자신의 노래실력과 별개로 왕성한 활동을 했으며 카네기홀에서 공연을 열기도 했다.
유년기에는 어떤 음악을 들으며 자랐는가?
유년기에 자발적으로 처음 산 앨범은 오케스트라인가 피아노인가 그런 종류의 명곡 모음집이었다. 그건 사실 진짜 마음이 동해서 샀다기 보단 초등학생 시절에 신촌에 목마레코드 같은 곳을 자주 돌아다니면서 뭔가 사고 싶은데 뭘 사야할진 모르겠고 피아노를 배우고 있으니 아는 음악 음반을 사자며 샀던 게 처음이었다. 그 다음에 정말로 자발적으로 샀던 음반은 서태지와 아이들 1집이다. 초등학교 때까지 서태지와 아이들을 들었고 유년기에 들은 음악은 그게 전부다. 이후 사춘기의 음악 경험이 나에겐 중요하다. 중학교 때는 삐삐밴드를 좋아했고 오빠의 영향으로 투팍(Tupac)같은 힙합 음반을 듣기도 했다. 그러다 크라잉넛 같은 당시 조선펑크라 칭하던 음악을 듣게 되면서 내가 좋아하는 건 이거라는 걸 알게 됐다. 차승우가 있던 시절의 노브레인 음악을 특히 좋아했다. 그리고 공연 일정을 알려주는 다음까페를 통해 클럽공연들을 보러다니게 되고 아워네이션이나 도시락특공대, 검은소리 같은 컴필레이션 음반을 듣는 재미로 살았다. 그 당시에는 라이센스반은 적고, 수입 CD는 가격이 비싸서 사고 싶은걸 다 살 수 없었다. 그래서 피씨통신 같은 것을 통해서 공CD를 구워서 파는 분한테 사서 듣고 그랬다.
또 홍대에 있던 음악감상실인 ‘백스테이지’에서 콜라를 마시며 음악을 신청해 듣고, 다른 사람들의 신청곡을 듣기도 했었다. 그때 보고 듣던 것들이라 하면 스매싱펌킨즈(Smashing Pumkims), 레이지어게인스트더머신(Rage Against The Machine), 너바나(Nirvana), 라디오헤드(Radio Head) 같은 전형적인 90년대를 대표하던 밴드들의 음반, 그리고 우드스탁 같은 페스티벌 영상들이었다. 내가 여성이기 때문에 그런 건지 모르겠지만 그 당시 결국에 가장 끌리던 건 그웬 스테파니(Gwen Stefani)였다. 고등학생 때 노다웃(No Doubt)이 한국에서 을지로의 트라이포트홀에서 단독 공연을 해서 보러 갔었는데 그 언니가 진짜 멋있었다. 그래서 나도 저런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결심했다. 모든 음악이 취향이었던 건 아닌데 ‘저스트 어 걸(Just a Girl)’이라는 노래 가사가 내 마음을 사로 잡았다.
유년기를 지나서 현재까지 손에 꼽을 만한 청각 경험의 순간이 있다면?
페스티벌이다. 고등학교 때 쌈싸페(쌈지 사운드 페스티벌)가 처음으로 열렸는데 그 전까지 공부하듯이 찾아 듣고 동경하던 우드스탁이나 글래스톤베리같은 페스티벌이 눈앞에서 펼쳐졌던 그 충격이 정말 컸던 것 같다. 그때 당시에 페스티벌 티켓을 붙여서 일기를 쓰고, 그 페이지를 두고두고 보며 그날의 기분을 회상하곤했다.
그 첫 번째 페스티벌 이후 1999년 12월 24일로 기억하는 샘표간장공장에서 했던 작은 규모의 쌈싸페 공연도 정말 크게 기억에 남는다. 입장료는 무료인데, 아마 천원을 받았던 것 같기도 하다, ‘딸기’ 굿즈를 비롯해 간장 등 선물도 진짜 많이 받았다. 막연하게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하게 되었던 것 같다. 간장공장 베뉴에서 클럽 공연을 할 수 있다는 사실 자체와 쌈지와 샘표 두 기업의 대표가 우정을 나누는 방식이 너무 멋져서 동경했던 게 생생히 기억난다. 그 공연이 끝나자마자 바로 홍대앞에서 거리를 막고 하는 공연을 보러 갔다. 작은 페스티벌 같은 느낌이었고, 직전에 관람한 쌈지 공연과 겹치는 라인업도 있었다. 하루종일 똑같은 음악 공연을 보고 또 봐도 마냥 좋았던 기억이다. 페스티벌에 가서 스캥킹과 슬램하며 놀고 사람들이 노는 모습을 바라보는 것도 즐거웠고, 그러면서 나도 앞으로 그런 무대에 설 거라는 꿈을 꾸게 됐다.
지금까지의 답변을 들으면 당연히 록밴드 멤버의 인터뷰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 같다. 전통 성악을 공부하고 처음 세상에 발표했던 작업이 <가곡실격>인데 어쩌면 본인이 꿈꾸던 동경의 무대와 현재 내가 하고 있는 것 사이의 고민의 발로가 아니었나 싶다. 가곡 실격도 그렇고 박민희의 초기 작업 대부분이 본인이 부르는 가곡의 현재성에 대한 고민을 담고 있는데 4년 전 <생기탱천>에서 만났을 당시만 해도 그때의 문제의식이 지금까지 유효한지는 의문이 든다고 말했다. 그 뒤로 4년이 지난 그 때의 질문은 얼마나 유효하고 또 어떻게 바뀌었나?
많이 바뀐 것도 있고 다시 회복하는 것들도 있다. 이를테면 이전에는 피부에 가까이 와닿지 않았던 기후위기 같은 것들. 이미 많은 사람들이 이야기하고 있었는데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산업화의 끔찍한 폐해라던가 자본주의가 인간의 삶에 종속되면서 생기는 문제와 같은 것들에 대해 이제는 현실에서 절박하게 느끼게 됐다. 그러는 과정에서 다시 작업으로 회귀해야 할 필요성을 느낀다. 이제는 시효가 끝난 게 아닐까 싶었던 질문들이 사실은 시효가 끝날 수 없는 질문이라는 걸 느끼고 있다. 좀 더 자세히 말하자면 초기의 작업들은 나의 개인적 문제와 식민주의를 연결하는 질문들이었는데 지금의 세상에선 인터넷이 문화계층을 다른 방식으로 나누기 시작했고 이미 국적으로 분류할 수 없는 시민이 탄생했는데 20세기의 틀로 제국주의와 식민지주의를 얘기하는 것이 무슨 소용이냐는 회의감이 있었다. 이 바뀐 시대와 세대를 계속 과거로 끌어들이고 과거를 기준으로 내가 계속 생각하고 있다는 자체가 어리석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런게 무의미하다고 느껴져서 2~3년간 작업을 하지 않았는데 지금은 다시 과거에 있었던 일과 현재 있는 일이 결코 다르지 않다는 생각을 한다. 제국주의에서 산업화, 자본주의 이런 것들로 단어가 바뀌었을 뿐이지 결국 같은 다르지 않은 이야기를 끊임없이 해야 하는 거구나. 결국 중요한 거는 권력이 생기면 문화적인 계층과 위계가 생기고 거기서 생겨나는 문제들인 거니까 그건 시효가 만료될 수 없는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계기가 무엇일까 생각해보니 코로나가 나에게 큰 의미였던 것 같다. 살아지는 대로 살면 안 되는 구나, 정신을 차리고 강력하게 저항해야 함을 느꼈다. 저항을 하는 과정에서 ‘다르게 살기’의 기술이 필요한 거고 그건 예술가로서 마땅히 해야 할 일이기도 하면서 내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이니까 그것을 의심하지 않고 작업을 계속해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다.
최근에 옵/신 페스티벌을 통해 <신들이 모이는 산에서 바람이 불어온다>(2023)을 발표했다. 앞서 이야기한 질문들이 녹아있는 작업인가?
작업을 단순하게 설명하자면 암전 속에서, 그러니까 이미지를 생산하지 않고, 영산회상을 연주하고 노래하는 거다. 처음에는 영산회상이 먼저 있지 않고 자본주의와 산업화에 대한 비판이자 반성에서 시작했다. 나는 어떤 음악을 해야 할 것인가라는 끝나지 않는 질문과 자본주의, 산업화, 물신주의 이런 것들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다가 어느 날 EBS 위대한 수업에서 헬레나 호지(Helena Norberg-Hodge)의 수업을 듣게 됐다. 지역으로 회귀해야 한다는 그의 말을 들으며 이상하게도 작업의 방향이 선명해졌다. 일단 내가 지금 질린 게 뭘까 생각해봤는데, 우선 코로나 시기에 공연을 영상으로 찍어서 방영하는 것에 의문이 있었다. 퍼포먼스란 순간에 존재하고 이내 휘발되는 것, 현장에 있는 사람들에 의해 공동체 감각이 만들어지고 뒤얽히면서 생겨나는 건데 영상이 어떻게 공연을 대신할 수 있는가? 그건 당연히 공연이 아니다. 그리고 코로나 때 NFT가 예술계 전면에 흘러들어 오면서 그런 공연으로서의 요소가 모두 삭제된 퍼포먼스를 판매할 궁리를 시작했다. 물질 세상에 비물질로 존재하는 퍼포먼스를 비물질의 세계인 가상세계에서 물질화해서 판매하는 것이 아이러니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든 물질화해서 팔아보겠다고 하는 그 행위들이 정말 기가 막히고 자본주의가 갈 데까지 갔구나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기막힘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하는 마음으로 작업을 시작했다. 처음엔 잡았던 방향은 소유할 수 없고, 팔 수 없고, 기록할 수 없는 걸 만들자는 거였다. 그 과정에서 풍류라는 개념을 가져 오고 거기서부터 가지를 쳐가면서 작업을 진행했다.
상당히 저항적인 작품이다.
나는 그런 마음 없이는 작업이 안 되는 것 같다.
암전을 사용한 연출이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모든 것을 팔 수 있으니 찍어서 팔 수 없도록 해보자는 생각이었던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최근의 사운드 작업들을 리서치하면서 시각적 자극에 너무 많이 의지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대학에서 공부할 시절 로고스 중심주의, 남성 중심주의를 비판하면서 시각중심주에 대해서도 비판하는 글을 봤는데 그 당시에는 시각을 비판한다는 말이 굉장히 막연하게 느껴졌다. 소리를 다루는 사람으로서 시각을 차단했을 때 얻을 수 있는 효과는 어떤 게 있었나?
어떤 음악이 흘러나올 때 듣는 사람이 자발적으로 눈을 감는 행위는 자신의 청각에 집중하겠다는 의미일 것이다. 하지만 불을 꺼버리는 것은 자발적이지 않고 굉장히 폭력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그래서 오히려 사람들이 눈을 어디다 둬야할지 모르는 것 같았다. 암전이 강제되었을 때는 그것이 불필요한 퍼포먼스로 읽히기 되기 십상인 것 같다. 시각을 완전히 배제하는 것을 전제로 했을 때는 음악이 더 잘할 수 있는 일이란 굉장히 어려운 것 같다. 하지만 이번 공연에서 암전을 통한 음악의 성공 여부는 애초에 목적에 두지 않았기에 그저 산업화에 대한 반성이 이번 공연에서 얻은 효과라고 말할 수 있다.
기존 작업에서 관람 형태에 대한 실험을 하기도 했다. <가곡실격: 방5>에서 가까이에서 들어야 하는 소리와 멀리서 들어야 하는 소리,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들어야 할 소리가 있다는 이야기들을 했던 것 같은데 그 이야기를 더 들어보고 싶다. 불편함을 감수하고서라도 들어야 할 소리에는 어떤게 있을까?
가까이 들어야 하는 소리라고 했던 건, 단순히 내 기준에서 내가 전공한 노래, 가곡이 음향을 통해 확성 됐을 때 멋있게 들리지 않아서 그런 거다. 객석과 무대가 멀리에 있는 환경에서 잘 들으려면 가곡에 맞는 음향이 연구되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상황인 것 같다. 음향이라는 것이 워낙 개인 취향을 많이 타는 영향도 있는 것 같다. 그간의 경험을 통해 내 취향은 가까이에서 들을 때 훨씬 좋게 들을 수 있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였다. 그리고 불편함을 감수해서라도 들어야 될 소리라는 건 사운드 자체에 대한 얘기가 아니라 내용에 대한 것이었다. 현재 사회는 자본의 흐름에 의해 듣는 음악이 결정된다. 고유의 취향이라는 것이 생기기도 쉽지 않다. 어떤 음악을 좋다고 느끼거나, 그 전에 음악으로 인식하려면 훈련이 되거나 교육을 받아야 하는데 그 과정에는 권력을 가진 콘텐츠만 대중에게 노출된다. 자발적인 훈련 혹은 교육 외에는 마케팅에 의해 대중에게 전달되는데 그 과정엔 자본의 권력이 크게 결부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저절로 들려오는 음악이 아닌 것들, 다른 소리들과 음악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것들도 스스로 찾아 들어야 한다는 취지로 얘기했던 것 같다. 낯선 것은 불편하다. 그러나 불편함을 감수하고 다른 것들을 들어야 한다.
음악가 중에 미술관에서 가장 많이 자신의 작업을 선보이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음악가로서 미술관에서 작업을 할 때와 공연장에서 작업을 할 때는 어떻게 다른 고민을 하는지 궁금하다.
의외로 음악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 음악을 잘하지 못한다는 콤플렉스가 있어서 그런지 모르겠는데 스스로 공연예술 작가라고 생각하고 그것이 나의 첫 번째 정체성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공연을 만들 때 어떤 과정으로 작업을 하냐는 질문을 받곤 하는데 나는 동시에 하는 편인 것 같다. 음악, 분위기, 재료, 관객 배치 방법 모든 게 얽혀 순식간에 떠오르는 편이다. 반면 음악을 만들 때는 답이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도 잘 모르겠다.
그래서 오히려 순수하게 듣기 위한 음악을 만들 때 나 자신이 무엇인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공연작품을 만들 때는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생각들을 어떤 구조와 형식을 통해 드러낼 것인지 고민하는데, 음악의 경우에는 음악 그 자체가 고민이다. 굳이 생산자가 되어야 할 것인가, 향유자로 만족할 수는 없는 것인가, 꾸준히 고민하고 있다.
박민희에게 공연은 왜 중요한가?
다시 어릴 때로 돌아가서 이야기하자면 대중음악을 들으면서 평범한 10대로 자라다가 국악고등학교에 진학하게 됐다. 당시에는 인문계를 떠나서 음악 고등학교에 간다는 희열과 열망 그리고 단순한 호기심이 있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학교에 다니는 친구들 중에 음악에 관심이 있는 친구가 별로 없었다. 게다가 학교는 매우 권위적이었다. 학교 생활이 재미없어지다보니 자연스레 처한 환경을 둘러보게 되었다. 그러다 공연에 문제의식을 갖기 시작했다. 학교에서 공연을 필수적으로 보게 했는데 음악은 재밌지만 공연이 재미가 없었다. 왜 내가 좋아하는, 이 멋있는 음악을 가지고 공연을 이렇게 만드는 거지? 내가 어른이 된다면 공연연출과 무대미술을 배워서 이 음악이 멋지게 보일 수 있는 공연을 만들겠다는 생각을 했다. 결국 미술이나 연출을 배우지는 못했지만 자연스럽게 공연을 만드는 일을 하게 됐다.
소리, 음악, 예술에 대한 관점이 뚜렷하게 정립되어 있는 사람이란 인상을 받는다. 내가 엔터테인먼트와 예술 사이에서 괴로워하고 있을 때 그 둘을 구분하는 프리 라이젠(Frie Leysen)의 강연 링크를 보내준 적이 있다. 강연을 듣고 어느 지점에서 명료해진 부분도 있지만 여전히 나에겐 애매하게 나를 괴롭히는 주제다. 역사적으로 파인아트와 대중문화의 구분을 파괴하려는 예술가들도 존재했고 그 작업의 일부는 다시 파인아트의 역사에 편입되기도 한다. 본인의 관점에 대해 다시 한번 설명해 줄 수 있는가?
먼저 나는 예술과 엔터테인먼트를 구분하는 입장이다. 때때로 예술이 엔터테인먼트로 기능할 수 있지만, 모든 예술이 엔터테인먼트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질문의 의도 위에서 답해보자면 대중문화는 산업을 기반으로 한다. 그리고 산업은 대량으로 생산되어서 물화되고 사고 파는 행위를 전제한다. 그럴 때 오늘날의 예술은 과연 그것을 긍정할 수 있는지 묻게 된다. 꼭 예술가가 아니라해도, 인류 마지막 세대가 될지도 모르는 기후위기 시대를 사는 사람으로서 모든 것을 물질화하는 행위에 대해 질문하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예술의 형태와 정의는 각 사회마다 다르겠지만, 2023년 오늘에 내가 예술가로서 하고 싶은 일은 대량생산과 산업화의 고리를 끊는 상상을 불러일으키는 행위다. 현재의 세상에 고정된 것들에 균열을 일으키는 작업을 하고 싶다. 그런 차원에서, 내 안에서는 대중문화와 예술이 구분되는 것 같다.
ᅠ
그런 구분을 하는 것부터 엔터테인먼트가 아닌 예술로서 뭔가 하고 싶은 이야기, 혹은 책임감이 있어 보인다. 예술가의 역할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나?
사람이 꼭 무엇을 위해 존재할 필요는 없지만, 사회적 차원에서 본다면 예술가의 존재는 다양화에 기여하는 것 같다. 예술이라는 단어가 실용적으로 사용될 때는 넓은 의미에서 많은 것을 수용하기에, 지금 나는 아주 좁은 의미의 예술에 대하여 얘기하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고 싶다. 예술가들은 타인을 즐겁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이 아니다. 주어진 규칙과 경쟁 밖에서 고유한 세상을 창출해내기 위해 노력한다. 그러기 위해 새로운 생각을 탐험하고 제안한다. 그 행동의 목적은 다름 아닌 사유 그 자체다. 그렇기에 각자의 세계엔 저마다 다른 철학과 지혜가 있다.
그렇다면 최근 활동하는 그룹 해파리(Haepaary)의 경우는 작가로서 박민희의 작업과는 다른 지향점을 가지고 있는건가?
해파리는 두 명이 함께하는 팀이라 내 의견이 해파리를 대표할 수는 없다는 것을 전제하고 이야기 하겠다. 가까이에서 보면 반대 방향에 있고, 멀리서 보면 같은 방향에 있다. 나는 해파리의 음악으로 대중음악계 소시민이 되고 싶다는 바람을 언제나 꿈꾸고 있다. 대중음악산업에 들어가는 것이 해파리를 통해 꿈꾸는 목표라 할 수 있다. 대량생산을 통한 대중문화와 산업화, 그리고 자본주의에 대한 반성을 이야기하던 개인작업과 해파리의 지향점은 어떻게 보면 괴리된다. 하지만 멀리서 보면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전통음악 언어로 대중음악계의 일원이 되는 것은 지금 음악산업 생태계에서는 매우 힘든일이고, 산업의 규칙을 벗어난 일이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따라서 그 자체로 일종의 저항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해파리의 전략은 무엇인가? 남창가곡을 다시 부른다는 시작점은 상당히 흥미로웠던 것 같다. 다만 전통성악의 발성법과 일렉트로닉을 접합한 음악이 프로젝트가 아닌 장기적인 활동으로 지속될 때 그것의 '엔터테인먼트'적인 가치가 빨리 소진되어 버린다는 느낌도 받는다.
나는 해파리로 새 음원들 발표 많이 하고 가늘고 길게 존재하고 싶다. 해파리가 경계하는 건 음악사회에 '고명처럼 얹어진' 존재가 되는 거다. 그동안 대중음악계에서 활동한 많은 전통음악가들이 장식처럼 존재한다는 인상을 주곤 했다. 해파리의 목표는 그저 그런 흔한 대중음악가가 되는 거다. 특별하거나 무시되는 존재가 아니라 음악사회의 평범하고 동등한 일원이 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부지런히 작업하고 음악을 통해 존재해야하는데, 내가 음악에 자신이 없는 점이방해요인이긴 하다.
ᅠ
작가로서의 활동, 해파리 활동 외에도 종종 현대음악과 그와 연결된 즉흥음악씬에서도 활동하고 있다. 현대 음악에도 애정을 가지고 있는가?
매력을 느꼈던 때가 있었다. 열병처럼 즉흥음악에 빠져든 시절이 있었는데 뭔가 제대로 했다고 말하기는 부끄럽고 누구에게나 찾아오는 사춘기 같은 거였다. 현대음악 같은 경우는 내가 전공한 것이 한국 고전음악이다 보니 고전을 기반으로하여 시대정신이 한눈에 읽히는 1950년대, 1960년대 전후 아방가르드 음악에 매료됐던 것 같다. 지금 내가 현대음악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그들의 정신은 여전히 멋지다고 생각한다. 그런 정신은 내 작업으로도 충분히 잘 표현하고 있는 것 같다.
멋지다고 생각하는 현대음악의 정신이란 어떤 거였나?
저항이라고 짧게 말하고 넘어가고 싶다. 현재를 기준으로 나 스스로를 현대음악가라고 소개할 수는 없는 상태이기에 길게 얘기하면 부끄러울 것 같다. 그나저나 최근에 친구가 어플로 내 사주를 봐준 적이 있는데 거기서 나에게 ‘혁명적 우울감’이 있다고 하더라. 우울함마저 혁명적인걸 꿈꾼다고 팔자에 쓰였나 보다(웃음).
사실은 록밴드가 오랜 꿈이라고 여러 곳에서 밝혀왔는데 올해 드디어 그걸 이룬 것처럼 보인다. 뭘 하고 있는지 간단히 소개해 줄 수 있는가?
취미로 펑크밴드를 하고 있다. 2년 전쯤인가 펑크밴드 하고 싶다고 SNS에 올렸더니 친구인 휘(WHI)가 하게 되면 같이 하자고 하더라. 그걸 기억하고 있다가 올해 초에 베이스를 배우기 시작하면서 밴드를 해보자고 다시 연락을 했고 그렇게 시작하게 됐다. 우리의 조건은 잘하는 거 하지 말기. 서로 못하는 거 하면서 약간 자축모드로 펑크밴드를 하는 거다. 드럼은 누가하면 좋을까 생각하다가 조율(Joyul)에게 연락해서 같이 하자고 제안을 했다. 처음에는 수지앤더밴시스(Siouxsie and The Banshees) 커버밴드를 하자고 했는데 너무 어려워서 나의 오랜 로망 중 하나인 비니키킬(Bikini Kill)의 곡들을 커버하고 있다. 직접 노래하면서 해보려고 했는데 초보라서 악기연주와 노래가 동시에 안되다 보니까 보컬도 영입하기로 했다. 조만간 공연을 할 생각이다.
박민희의 작업을 지켜보면 예술가나 기획자를 포함하여 생물학적인 여성들과 함께 작업하는 것에 큰 행복감이나 의미를 두고 있지 않은지 생각이 든다. 동시대를 기록하는 예술사가가 존재한다면 기록할 만한 중요한 흐름이 만들어 지는 것도 같다.
자연스럽게 옛날부터 여성들과 해왔던 것 같다. 작업을 위해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면 거의 대부분 여성들과 작업해 왔다. 일부러 그렇게 하려고 하지 않아도 내가 여성이다 보니까 누군가가 뭔가를 하고 있다고 상상할 때 거기에 늘 여성 외에는 생각이 잘 안 난다. 예를 들어 소설에 ‘나’라고 적혀 있으면 당연히 여자로 상상해서 읽다가 중간에 남자인걸 알고 몰입이 깨지는 경우가 많았는데 그런 경우처럼 여성 동료들과 함께 하는 게 내게 자연스러운 일인 것 같다.
인터뷰가 거의 마무리되고 있다. 나의 작업은 인터뷰를 통해 동시대적인 소리의 배경을 탐구하는 것이다. 동시대를 살아가며 누구보다 온몸으로 질문을 던지며 저항해 온 사람으로서 본인이 생각하는 동시대성이란 무엇일지 또 그 안에서 전통 음악을 공부했던 유산은 어떤 역할을 하는지 궁금하다.
지금의 시대를 떠올리면 멸망이라는 말이 먼저 떠오른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 시민들이 느끼는 공통된 감각인 것 같다. 전통음악의 현 시대적 소명은 다양성이라고 생각한다. 한국 전통음악이 이렇게 명맥을 잇지 못하는 이유는 제국주의의 결과일텐데 전통을 이대로 사라지게 둘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한 문제, 이미 사라진 것은 기정사실이지만 그런데도 소수 언어로 존재하게 할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해 생각해 볼 수 있다. 소수 언어가 존재한다는 의미는 소수 언어에 깃든 삶의 방식이 남아있다는 거다. 그렇다면 남기는 것이 산업화와 물질주의를 해체할 수 있는 데에 일조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게 나의 생각이다.
지금 시대의 것이 아니더라도 본인에게 중요한 소리, 사람들이 함께 들었으면 하는 소리가 있나?
특정 소리라기 보다는 개개인의 생활 속에서 의지를 갖고 안 듣던 소리들을 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 세상에 되게 다양한 것이 있음을 의식적으로 느끼면서 살았으면 좋겠다. 지금 이 거대한 자본의 흐름을 막을 수는 없지만 그 흐름이 권유하는 대로 살다보면 아무런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의식적으로 관습을 끊어내고 하루에 한 곡도 듣지 않던 음악들을 찾아보고 차트에 없는 음악도 들어보는 노력이 필요한 것 같다.
마지막 공식 질문이다. 본인의 무의식을 녹음할 수 있는 마이크가 있다면 어떤 소리가 녹음 될 것 같나?
피 끓는 소리(웃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