듣기에 대한 듣기를 듣기
- 안상욱의 <12 Sounds>로부터 자기참조적 청취의 인지적 침투 가능성을 검토하기


전대한


  듣기를 듣는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듣기에 대한 듣기’는 얼핏 쉽게 가능할 것 같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나 자신을 포함한) 어떤 주체의 청지각 경험 그 자체를 듣는다는 것이 무엇일지를 구체적으로 그려내기란 쉽지 않다. 어떤 주체가 듣고 있는 소리를 ‘따라서(혹은 함께)’ 듣거나 어떤 주체가 특정한 소리를 들을 때 불수의적으로 이루어진 여러 움직임으로 인해 발생한 소리를 들을 수는 있지만, 듣기 그 자체를 듣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떤 내용의 지각 경험일지를 상상하기란 여전히 어렵기 때문이다.


  물론 또 다른 지각 양태인 시지각을 통해 유비해 본다면 ‘듣기에 대한 듣기’도 마냥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다. 누군가가 무언가를 보는 것 그 자체를 보는 것은 얼마든지 가능하다. 오히려 타인의 시지각 경험에 대한 시지각은 일상적으로 당연하게 이루어진다. 물론 다른 사람이 무언가를 보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시지각 경험의 외피를 보는 것일 뿐, 그 경험의 내적 과정까지 지각하는 것은 아니라고 반론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조차도 그리 큰 문제는 아니다. 예컨대, 짐벌을 사용하여 연출되었거나 핸드헬드 기법으로 촬영된 POV를 떠올려보라. 이처럼 우리는 타인의 시점을 완벽하게는 아닐지라도 거의 유사한 양태로 재현할 수 있다. 심지어는 어안렌즈를 사용하여 제작된 영상의 경우, 설령 완벽하진 않을지라도 물고기처럼 다른 종에 속하는 지각 주체의 시지각 경험이 어떻게 추동되는지까지 이해할 수 있도록 만든다. 이러한 점에서 적어도 시지각의 경우 해당 지각 경험 그 자체를 지각하는 자기참조적 지각이 충분히 가능해 보인다.


  그렇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시지각에 한정된 이야기이다.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서 과연 청지각 경험은 자기참조가 가능할까? 혹은 우리는 듣기 그 자체를 들을 수 있을까? 누군가가 듣는 행위 그 자체를 메타적으로 혹은 나 자신이 듣는 경험 그 자체를 재귀적으로 듣는 일은, 어느 순간 그저 여타의 일반적인 듣기와 동일한 층위에서 이루어지는 또 하나의 ‘듣기’가 되어버리는 것만 같다. ‘듣기-듣기’가 아니라 또 다른 ‘듣기’에 불과한 심적 활동이 이루어질 뿐인 것처럼 보인다는 말이다. 왜냐하면, 어떤 주체의 듣기를 메타적으로 듣는 경험의 내용에는, 그 주체가 듣고 있는 청각적 대상에 해당하는 소리가 아니라 주체의 청지각 경험이 이루어질 때 발생하는 특정한 것들이 포함되어야만 할 텐데, 대개 우리는 타인의 청지각 경험을 들을 때 무심코 해당 청지각 경험의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곤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기참조적 듣기, 즉, 듣기에 대한 듣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처럼 느껴진다.


  하지만 안상욱의 <12 Sounds>는 듣기에 대한 듣기의 가능성을 함축한다. 지난 10월 TINC에서 약 1시간가량 진행되었던 라이브 퍼포먼스에서, 안상욱은 제목처럼 제각기 다른 12개의 소리를 들려주었다. TINC의 가장자리 벽면을 따라 일정한 간격을 두고 설치된 12개의 모노 스피커는, 기본적으로 그가 책 『음악가의 소리들』을 위해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던 12명의 인터뷰이가 전달한 소리들을 재생한다. 이를테면, 초반에는 누군가가 선택한 금속성의 소리가 (퍼포머를 바라보고 있는 청중을 기준으로) 5시 방향에 위치한 스피커에서 들려오다가, 동시에 3시 방향에 위치한 스피커에서 대금 소리가 재생되거나 8시 방향에서 피아노 연주가 들려오기 시작하고, 11시 방향에서 성악가의 노랫소리 등이 들어오는 등 또 다른 이들이 선택한 소리들이 겹겹이 쌓이거나 사라지는 식이다.[1]


  이때 서로 밀어내거나 중첩되기도 하는 12개의 소리는 모두 고유한 주체(인터뷰이)로부터 지각된 대상들이다. 하임, 이태훈, 남메아리 등 다양한 장르에서 자신의 음악적 스타일을 공고히 하고 있는 12명의 음악가는, 인터뷰어 안상욱으로부터 ‘스스로에게 의미 있는 소리’를 선별할 것을 요청받아 인터뷰가 끝난 후 안상욱에게 해당하는 음원을 전달했다. 다만, 인터뷰이가 전달한 소리가 있는 그대로 제시되진 않는다. 안상욱이 그렇게 전달받은 음원을 듣고서 변형하거나 왜곡하고 또 합성하는 등 여러 방식으로 가공하여 자신이 들은 ‘그’ 소리들을 내어놓기 때문이다. 결국 <12 Sounds>의 소리들은, 12명의 음악가가 각각 들은 것을(듣기1), 안상욱이 듣고 가공하여(듣기2), 끝내 청자에게 들려지는 대상이다(듣기3). 즉, <12 Sounds>를 관람한 청중의 듣기는 일차적 듣기도 이차적 듣기도 아닌 삼차적 듣기로서, 청중의 듣기는 ‘‘듣기1에 대한 듣기2’에 대한 듣기’인 듣기3인 셈이다.


  이 듣기들 사이에는 시차가 발생한다. 청중의 듣기에 해당하는 듣기3은 곧 ‘특정한 소리 사건을 지각하는 경험-사건(듣기1)을 이차적으로 지각하는 경험-사건(듣기2)’을 또다시 지각하는 경험-사건이기에, 여기에는 당연하게도 물리적인 시점과 논리적인 순서에서의 차이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시차는 자연스럽게 다른 심적 상태가 개입할 수 있는 여지를 만들어내며, 각 듣기의 결과적 차이를 파생시킨다. 안상욱의 라이브 퍼포먼스를 감상하는 청중은 분명 12명의 음악가가 지각한 바로 그 소리와 현상적으로 동일한 소리를 듣지만, 의미적으로 상이할 수 있는 소리를 듣게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12명의 인터뷰이가 안상욱의 요청에 따라 자신의 기억을 반추하여 특정한 소리를 선택하여 전달하는 과정에서 이미 한 번의 심적 개입이 발생했을 수도 있지만, 이를 차치하고서라도 <12 Sounds>에서는 두 차례의 개입이 이루어진다. 안상욱은 전달받은 소리에다가 인터뷰이에 관한 안상욱 자신의 기억으로부터 발생한 인상과 느낌 등을 덧붙인 소리를 관객에게 제시했으며, 심지어 <12 Sounds>의 청중은 그렇게 제시된 소리에 각자의 감정과 사고, 기억 등을 한 번 더 덧붙여 듣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안상욱은 <12 Sounds>의 의도를 밝히며 “모든 소리는 저마다 특정 시대의 흔적을 담고 있다. 소리를 듣는 사람 역시 자신이 살아온 시대의 청취 경험과 기억을 매개로 듣는다.”[2]라며 역사적 지식이나 기억과 같은 인지적 상태의 개입을 명시적으로 옹호한다. 이러한 진술에 근거했을 때, 『음악가의 소리들』과 <12 Sounds>에서 발생한 n차적 듣기 간의 시차는 ‘기억’이라는 인지적 상태가 침습한 흔적이다. 요컨대, 안상욱은 <12 Sounds>와 『음악가의 소리들』을 통해 이러한 시차가 듣기의 본질적 요소임을 예증하고 싶어 하는 듯하다. 혹은 달리 말해, 안상욱은 듣기에는 필연적으로 청자의 인지적 상태가 선제한다고 주장하는 것처럼 보인다. 듣기는 발생한 소리 그 자체를 있는 그대로 포착하는 수동적인 수용의 과정이 아니라, 그러한 수용에 인간의 듣기가 더해진 능동적이고 복합적인 과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주장이 안상욱만의 새로운 것은 아니다. 인지과학과 심리철학에서 지각 경험에 대한 인지적 침투(cognitive penetration)를 옹호하는 이들은, 앞서 언급했던 것과 유사한 논의를 제시한다. 전통적으로 지각은 ‘정보적으로 밀봉된(informationally encapsulated)’ 심적 상태로 여겨져 왔다. 즉, 지각은 마치 하나의 독립된 모듈처럼 특정한 기능을 수행하기 위해서 다른 모듈로부터 정보 차원에서 독립되어 있다는 것이다.[3] 그러나 인지적 침투를 옹호하는 사람들은, 우리의 믿음이나 기대, 욕구와 같은 인지적 상태가 감각 경험에 기반을 둔 지각과 같은 심적 상태에 직접적인 영향을 준다고 주장한다. 쉬운 예로, 물 두 컵이 있다고 해보자. 사실은 성분이 완전히 동일한 물인데도 누군가 한쪽 컵에 담긴 물에 대해서만 “이 물은 @@온천의 지하 암반수야”라고 말한다면, 우리는 그 한쪽 컵에 담긴 물에서만 유황 냄새를 맡는다거나 더 부드러운 촉감이라고 지각하는 경우가 생긴다. 이처럼 우리가 알고(인지하고) 있는 것이 우리의 지각 경험의 내용을 바꾼다는 것이다.


  흥미롭게도 인지적 침투에 관한 철학적 논의는 <12 Sounds>에만 그치지 않고 음악에 관한 안상욱의 사유 전반과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는 악음을 “주기적 진동수를 지닌 음, 곧 음고(pitch)가 있는 음”으로 규정하는 고전적 정의 대신, “진동수에 상관없이 ‘음악적으로 선택되는 음’”을 지칭하는 것으로 넓게 이해할 것을 제안한다.[4] 물론 “음악적으로 선택된다”라는 것이 구체적으로 어떠한 과정인지를 설명하고 있지는 않다는 점에서 다소 모호한 논의지만, 어찌 됐든 특정한 기준에 의해 선택된 대상이 곧 음악을 구성하는 대상이라고 간주하는 방식은 그 대상에 관한 ‘판단’이라는 인지적 상태의 필요성을 함축한다는 사실만큼은 분명하다. 또한, 특정한 대상에 관한 판단은 곧 이유(reason)를 수반하고, 그 이유가 정당화하는 진술 사이에는 ‘추론’이라는 또 다른 인지적 상태도 필요로 한다. 그렇기에 인지적 침투에 관한 찬동은 음악의 토대적 개념에 관한 안상욱의 또 다른 주장들과도 정합적이라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하자면 <12 Sounds>는 단순한 음향적 채집을 넘어, 듣기에서 인지적 침투가 선제함을 예증하고 이를 토대로 듣기 개념의 작동 양태를 사유하는 규정적 탐구에 가깝다. 필연적으로 조금씩 어긋나며 발생하는 듣기들 사이의 시차 속에서 소리는 수동적으로 수용되는 자료에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주체의 기억이나 판단이 개입하여야만 비로소 완성되는 재료가 된다. 끝내 우리는 <12 Sounds>로부터12명의 음악가로부터 수음한 소리 그 자체를 넘어, 듣기 사이의 시차를 비집고 들어가는 주체의 인지적 상태와 그 침투가 상기시키는 ‘듣기’라는 사건 그 자체를 듣는다.




[1] 표시된 방향과 소리는 기억나는 대로 임의로 작성했다. 정확한 방향과 배치를 확인하고 싶다면, <12 Sounds>의 리플렛을 참고하라.

[2] <12 Sounds> 서문에서 발췌.

[3] 대표적으로 제리 포더와 같은 이들이 이러한 입장을 취한다.

[4] 안상욱. 『음악가의 소리들』. 이매진. 2024. p.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