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겨진 악기를 향한 시선들, 손짓들

신예슬

자동 악기의 대표주자라고도 할 수 있을 ‘자동 피아노’는 인간을 대신해서 피아노를 연주하는 기계다. 20세기 초, 세간에 등장한 이 장치에 대한 입장은 둘로 나뉘었다. 누군가에게 이는 인간의 자리를 위협하는 장치였지만, 누군가에겐 새로운 음악적 가능성을 보여줄 수 있는 신기술의 집약체였다. 작곡가 조지 앤타일은 후자였고, 그는 이 특별한 기계에 열광하며 〈발레메카닉〉을 썼다. 그가 “기계로 만들어진, 기계를 위한 음악”이라고 말한 〈발레메카닉〉은 자동 피아노 16대와 사람이 연주하는 피아노, 실로폰, 베이스 드럼, 비행기 프로펠러, 사이렌 등의 다양한 기계장치와 악기가 한데 뒤섞여 연주되는 곡이다.

음악학자 원유선은 이돈응의 로봇악기 ‘드로봇’의 역사적 전통을 찾기 위해 연주하는 로봇의 역사를 찾아나서고, 다음의 두 사례를 발견한다. “프랑스의 발명가였던 보캉송(Jacques de Vaucanson, 1709-1782)은 1738년 최초로 플루트를 연주하는 자동인형을 선보였는데, 악기의 구멍을 열고 닫을 수 있는 손가락뿐만 아니라, 호흡을 조절할 수 있는 금속 혀와 근육까지 갖추고 있었다. (…) 연주하는 자동인형이 계속해서 이목을 집중시키자 1774년에는 스위스의 시계장인이었던 피에르 자케 드로(Pierre Jaquet-Droz, 1721-1790)가 ‘오르간 치는 숙녀’(Musical Lady)를 발표하였다. 사람들은 악기 앞에 가지런히 앉아 다섯 개의 정교한 구조의 기계손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이 자동인형에 곧바로 사로잡혔다. 오르간 치는 숙녀는 1776년 런던의 한 전시회에서 음악적 호흡과 눈의 움직임까지 구현한다고 홍보된 것처럼 건반을 치는 손을 따라 머리와 눈을 움직이고 가슴을 들썩이며, 때로는 옷매무새를 바로잡는 등 연주에 수반되는 갖가지 정교한 제스처를 자랑하였다.”(「작곡가 이돈응의 로봇음악 연구: 드로봇(dRobot)을 중심으로」, 2023)

먼저 앤타일의 경우, 그의 대목표는 아무래도 ‘기계들의 합주’인 것 같다. 내가 보기에 이 작업에서 악기는 아름다운 음악을 만들기 위해 잘 사용된 후 우리의 시야에서 사라져도 되는 무언가가 아니다. 이 공연이 정말로 감상하게 해주는 것은 음악 그 자체가 아니라 이 기계들이 만드는 ‘장관’에 가까워 보인다. 그리고 18세기 연주 기계들의 경우, 이들의 대목표는 인간 연주자의 모방인 것 같다. ‘연주’라는 행위가 이루어지긴 하고 그것의 수준도 꽤 높았다고는 하나, 이들이 정말로 감상하게 해주는 것은 연주 그 자체가 아니라 이 인형의 능력치이기 때문이다.

안상욱의 〈Left Behind〉에서도 기계 장치들이 꽤 원초적인 악기를 연주하며 만들어내는 합주의 장관이 펼쳐지고, 인간의 손을 대신해 20여 개의 악기가 연주된다. 그렇지만 이 작업은 이 기계들의 합주를 보란 듯이 보여주지도, 인간 연주자의 모방에 초점을 맞추지도 않는다. 자동으로 연주되는 것처럼 보이는 악기 또는 사람을 대신해 연주하는 기계장치가 있다는 점은 같지만 안상욱의 〈Left Behind〉는 선례들과는 미묘하게 어긋난다. 안상욱의 작업에서 우리가 경험하게 되는 것과 그것의 대목표는 조금 다른 곳에 있는 것 같다.

〈Left Behind〉는 남겨진 악기들을 바라보는 안상욱의 ‘애잔한 시선’으로부터 시작한다. 기획자이자 작곡가인 그는 오랜 시간 타악기 연주자로도 살아왔다. 내가 이해하기로 타악기 연주자들의 일은 공연에 쓰일 악기를 고르는 것에서부터 시작한다. 그들은 작업실 곳곳에 흩어져있는 악기들을 찬찬히 둘러보고, 나무와 흙, 가죽, 금속 등 서로 다른 물성과 서로 다른 형태를 지닌 악기 중 무엇이 이 음악에 어울릴지 선별하고, 그 악기를 한데 늘어놓아 작은 무대를 만든다. 연주자는 음향 면에서도, 동선 면에서도 가장 적절한 배치로 악기를 펼쳐놓고 그것들을 두드려본다. 그 작은 무대에 익숙해지는 시간을 보낸다. 아마도 다음 공연에서는 다른 악기로, 다른 무대를 꾸리게 될 것이다.

타악기 연주자에게 악기는 언제든 꺼내 쓸 수 있는 일종의 음향 라이브러리처럼 존재한다. 매번 무대 위로 나가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악기도 있지만, 한편에는 그렇지 않은 수많은 악기가 조용히 놓여 있다. 〈Left Behind〉에서 합주의 주체가 된 것은 바로 100회 이상 연주된 악기부터 10회 미만으로 연주된, 때론 0회 연주된 악기들이다. 한 공연에서 20개가 넘는 악기를 연주하기 위해서는 이제까지와 같이 바쁘게 움직이며 연주의 동선을 짜거나, 동료 연주자들을 불러 모아 함께 연주할 수도 있었겠지만…… 안상욱은 사람이 아닌 ‘악기’와 함께 합주하기를 택한다. 악기들은 솔레노이드 장치로 연결되어 마치 모두 안상욱의 손이 연결된 것처럼 단번에 연주될 수 있다. 악기들에는 그의 손을 대신할 장치들이 가장 정확한 타격지점에 준비되어 있었고, 연주가 되어야 할 때 장치들은 악기를 친다. “내 악기들이 오직 나의 의도대로 움직이며 합주를 할 수 있다면 어쩌면 이것은 음악가가 오랫동안 바랐던 꿈은 아닐까?” 그의 대목표는 아마도 이러했겠다.

그러나 공연을 앞둔 그는 어쩐지 이렇게 쓴다. “최종적으로 무대 위에 남겨지는 것은 소리 이전에 불가능한 목표를 위해 노력하는 예술가의 욕망이자 안타까운 실패이다.”

합주는 성공적이었다. 실패는 어디서 기인했을까? 그는 악기들과 함께 ‘남겨진 소리’ ‘솔레노이드 삼바’ ‘날카롭고 지저분한’ ‘쓸쓸하고 아름다운’ ‘낯선 꿈’을 연주했다. 선율이 느슨하게 유영하는 듯한 곡부터 생동감 넘치는 리드미컬한 합주, 파열음과 금속성 소리가 도드라지는 곡, 신시사이저로 연주하는 선율의 독무대에 타악기가 반주자로 거드는 듯한 곡, 방향성 없이 어디로든 흘러가보는 곡이었다. 마지막으로 연주된 ‘솔레노이드를 위한 연습곡 1번’은 솔레노이드 장치들이 가장 잘할 수 있는 곡이었다. 칼같이 정확한 박자로부터 구현되는 템포의 협화와 불협화, 피로함 없이 계속될 수 있는 연타 등. 합주는 다양한 방식으로 이뤄졌고, 그 과정에서 악기와 맺는 음악적 관계도 조금씩 달라졌다.

이건 타악기들로 만드는 합주였다. 타악기는 ‘연주 기계’로 치기에 어쩌면 가장 단순한 것일 수도 있지만 동시에 가장 복잡할 수도 있는 악기다. 일단 치면 소리는 나겠지만, 타악기 연주의 핵심은 각 악기의 서로 다른 음향적 조건을 파악하고, 순간 어디를 언제 어떻게 쳐서 어떤 소리를 낼지 결정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기서 순간 발생하는 손의 감각, 그 감각을 만들어내는 기억이 필요하다. 나는 이렇게 생각하지만…… 타악기 연주가 사람의 손으로부터 빠르게 벗어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연주 기계는 생각할 것도 없이, 이제는 유구한 전통이 된 드럼머신은 물론, 이젠 그마저도 직접 조작할 필요 없이 그냥 찍어놓은 것을 트는 일이 많아져 무대 위에 꼭 타악기를 가져오지 않아도 되는 상황도 많아졌다. 장르에 따라 편차는 크겠지만 전반적인 상황은 그래 보인다. ‘남겨진 것’은 작업실 속에서 잘 쓰이지 않는 악기뿐 아니라, 타악기 그 자체이기도 했을까?

대단히 신나는 대규모 합주도 있었고, 나긋한 앙상블곡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Left Behind〉에는 어딘가 애잔한 구석이 배어 있었다. 일차적으로는 창작자의 마음이 어딘가 틈틈이 배어있어서겠지만, 손이 아닌 다른 것으로 연주되는 악기를 볼 때의 묘한 감각이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내게 그건 상실감, 아주 미묘한 거슬림, 오싹함이 뒤섞인 어떤 것이다. 아마 이렇게 느끼는 이유는 내가 그 악기가 연주되는 상태를 무언가 부재한 상태로 보기 때문일 것 같다. 여기서 부재한 것은 사람의 물리적인 손만이 아니다. 연주는 반드시 인간의 것이어야 한다는 믿음의 부재, 그리고 이 실제 악기들이 언젠가 쓸모없어질 수도 있다는 마음에서 비롯되는 필요의 부재도 있다.

그런 맥락에서 보자면 〈Left Behind〉는 마땅히, 필연적으로 생겨났을 법한 종류의 공연은 아니다. 이건 조용히 사그라드는 무언가를 가만히 보고 있을 수만은 없었던 사람이, 떠나보낼 수 없는 마음으로 끝끝내 만들어낸 일인 것 같다. 그 실패의 감각은 바로 여기서 기인할지도 모르겠다. 이미 지나가버린 것, 나에게도 대단히 필요치 않아져버린 것을 어떻게든 되살려보고 싶지만 나 혼자의 힘으로는 역부족일 때, 판도를 바꿀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 때 찾아오는 그런 실패감. 그건 그가 만들어낸 작업물이 아니라 이를 둘러싼 상황에 대한 것처럼 보인다.

안상욱은 “누군가는 ‘그냥 사람이랑 합주를 하지 왜 저런 수고를 하는지’ 처연한 의구심이 들지도 모른다”고 썼고 나는 이 말을 그의 또 다른 마음처럼 읽는다. (아마도 프로젝트를 구현하는 그 지난한 과정에서, 그보다 더 많이 저 문장을 떠올린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시간이 가던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도록 굳이 잠시 붙잡아 보는 일을 좋아한다. 자연스럽게 흘러가는 것처럼 보이는 일들을 잠시 멈추어보려는 그 수고로운 일들을 통해서만 드러나는 것이 있기 때문이다. 그건 무용해지는 것들을 애정어린 눈으로 바라보는 마음이기도, 무언가에게 제 쓰임을 찾아주고 싶다는 선의이기도 하다.

동시에, 남겨질 것들이 꼭 ‘0회 연주된’ 타악기들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기도 하다. 필요와 효용의 관점에서 보자면 (소수의 예를 제외하고) 거의 대부분의 악기도 연주도 연주하는 사람도 꼭 안전한 곳에 있지만은 않다. 누군가 ‘그냥 음원을 틀지 왜 저런 수고를 하는지’라고 말하는 장면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지금 자동 악기와 연주 기계가 주는 그 이상한 정서가 앞으로는 ‘연주’라는 행위가 주는 애잔한 정서와 연결되리라는 생각은 잘 사라지지 않는다. 내가 이 공연에서 보고 들은 것은 온갖 종류의 타악기가 신시사이저와 함께 ‘한 사람에 의해’ 합주되는 광경이었지만… 정말로 경험한 것은, 바로 이런 온갖 마음이 뒤섞인 정동이었던 것 같다. 매끈한 블랙박스 안에서 어떤 방식으로 소리를 만들어내는지 알 수 없게 만든, 연주를 괄호치고 소리를 산출하는 음악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는 것이다.

어떤 이야기가 더 이어질 수 있을지 아직은 모르겠지만 일단은 이런 질문들이 남는다. 이 악기들은 계속 그의 합주자가 될까. 다른 방식의 연주도 가능할까. 어떤 생명력이 더해질 수 있을까. 다음 연습곡에서 이 악기들은 어떤 것을 연습할 수 있을까. 그간 만들어왔던 음악의 흐름과 자연스레 연결되는 곡들이 아닌, 이 연주 시스템의 조건으로부터 시작하는 음악을 만든다면 그 음악의 형태와 흐름은 어떻게 달라질까. 악기와 함께 합주하고 싶다는 그의 첫 목표는 정말로 충분히 해소됐을까. 그렇지 않다면 어떤 합주가 더 필요할까, 등등. 이 작업은 양방향으로 열린 길 위에 놓인 것 같고, 이곳이 출발점일지, 도착점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다만 작게나마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처음과 끝을 명확히 알고 달리는 이들보다 길 위에서 충분한 시간을 보내는 이들이 때론 누구보다도 멀리 간다는 것이다.